대가야의 왕릉 대가야의 역사 대가야의 문화 대가야의 왕릉 대가야의 왕릉(王陵),위대함을 보다! 대가야읍을 병풍처럼 감싸는 산 위에는 대가야시대의 주산성이 있습니다. 그 산성에서 남쪽으로 뻗은 능선위에는 대가야가 성장하기 시작한 서기 400년경부터 멸망한 562년 사이에 만들어진 대가야 왕들의 무덤이 줄지어 늘어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발굴된 순장묘 왕릉인 지산리 44호와 45호 무덤을 비롯하여, 주변에 왕족과 귀족들의 무덤이라고 생각되는 크고 작은 700여기의 무덤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대가야의 독특한 토기와 철기, 말갖춤을 비롯하여 왕이 쓰던 금동관과 금귀걸이 등 화려한 장신구가 많이 출토된 대가야 최대의 고분군입니다. 대가야 무덤은 주로 뒤에는 산성이 있고 앞에는 마을과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산마루와 산줄기에 위치합니다. 특히 왕 무덤은 한가운데 왕이 묻히는 큰 돌방을 하나 만들고, 그 주위에 껴묻거리를 넣는 돌방 한두 개와 여러 개의 순장자들의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돌방은 길이에 비해 폭이 아주 좁은 긴 네모꼴인데, 깬 돌을 차곡차곡 쌓아 벽을 만들고 그 위에는 큰 뚜껑돌을 여러 장 이어 덮었습니다. 무덤 둘레에는 둥글게 돌을 돌리고 그 안에 성질이 다른 흙을 번갈아 다져 가며 봉분을 높게 쌓았습니다. 지산리 30호분 지산리고분군의 가장 아래쪽에 해당하는 왕릉전시관 앞에 있으며 봉분의 밑지름은 18m 정도입니다. 1994년 발굴조사를 했는데, 가운데 큰 돌방을 니들고 그 옆에 딸린 돌방과 순장자의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가운데 돌방의 바닥 아래에 또다시 돌덧널이 만들어져 있어 무덤이 2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편 순장자의 무덤에서는 어린아이 뼈와 금동관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선사시대의 바위그림이 새겨진 돌을 깨어와 무덤의 뚜껑돌로 사용하였습니다. 지산리 32 ~ 35호분 지산리고분군의 능선 중간부분에 있는 무덤으로 모두 봉분 밑지름이 10~15m 정도 되는 것입니다. 1978년 발굴조사에서 32호분에서는 금동관과 갑옷ㆍ투구 등이 출토되었고, 또 그 옆의 무덤에서도 봉황머리와 은으로 새긴 넝쿨무늬가 장식된 큰칼이 나왔습니다. 산 위쪽에 있는 큰 왕릉들 보다는 조금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며, 주변에는 이보다 약간 규모가 작은 무덤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지산리 44호분 지산리고분군에서 규모가 큰 것에 속하며 능선 정상의 바로 아래에 있습니다. 1977년에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무덤의 밑지름이 27m에 이르며 가운데에 왕이 묻힌 큰 돌방이 있고, 그 남쪽과 서쪽에 껴묻거리를 넣는 딸린 돌방이 2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위에 작은 순장자의 무덤이 32개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무덤은 모두 40명 이상의 사람이 한꺼번에 묻힌 왕릉으로 추정되며 대가야가 가장 국력이 컸을 때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됩니다. 지산리 45호분 지산리44호분 바로 위에 있으며 역시 1977년에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무덤의 밑지름이 28m에 이릅니다. 가운데 왕이 묻히는 큰 돌방을 만들고 그 옆에 껴묻거리를 넣는 딸린 돌방을 마련한 다음, 주변에 11개의 순장자 들이 묻히는 무덤이 만들어졌습니다. 순장자는 14명 이상이었습니다. 순장(殉葬)이란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그를 위해 살아 있는 사람이나 동물을 죽여서 함께 매장하는 장례행위를 말합니다. 사람을 죽여서 다른 사람의 장례에 사용한다는 것은 강력한 권력을 소유한 통치자 집단의 지배력을 반영하는 것으로 특히 고대 세계에서 널리 성행한 풍습입니다. 이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삶을 계속한다고 믿었던 고대인들의 계세사상(繼世思想)에 따라 이승에서의 생활을 저승에서도 그대로 누리라는 의미에서 행한 것입니다. 역사 기록이 거의 남지 않은 대가야에서는 고분 발굴을 통해 지배층에서 순장이 대대적으로 실시되었음이 밝혀졌는데, 이로써 가야에도 고대국가 공통의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