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야의 문화(文化),
날개를 달다!

대가야는 서기 300년대 이후부터 차츰 다른 지역과는 구별되는 모양의 토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대가야읍 내곡리의 대가야시대 토기가마터는 완만한 산기슭에 넓게 자리 잡고 있는데 깨어진 가마벽 조각과 불에 탄 흙덩어리들이 토기조각들과 함께 흩어져 있습니다. 비스듬한 지형을 이용한 굴가마를 사용했으며 대체로 서기 400년대부터 대가야가 멸망한 후인 600년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사용되었습니다. 대가야 토기는 이곳에서 만들어져 점점 대가야의 세력이 미치는 곳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대가야, 의 · 식 · 주를 만나다

굽다리접시, 긴목항아리, 그릇받침 등으로 대표되는 ‘대가야양식 토기’는 부드러운 곡선미와 풍만한 안정감이 특징입니다. 굽다리접시는 접시가 납작하고 팔(八)자 모양으로 벌어지는 굽다리에는 좁고 긴 사각형 구멍이 일렬로 뚫려 있습니다. 긴목항아리는 긴 목이 부드럽게 좁아들어 몸체부분과 S자형 곡선을 이루며 여러 겹의 정밀한 물결무늬가 그려져 있습니다.바리모양 그릇받침은 대야 같이 넓고 깊은 몸체에 여러 겹의 물결무늬와 솔잎모양의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대가야가 국력을 키우는데 철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대가야의 주요 철산지는 야로와 쌍림면 용리 등 미숭산(734m) 기슭으로추정됩니다. 특히 야로의 철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나라에 세금으로 바쳤을 만큼 품질이 좋았습니다. 야로와 쌍림의 제철유적에서는 철광석을 녹이기 위한 제철로(製鐵爐)의 파편과 슬래그(쇠똥:鐵滓)가 많이 흩어져 있고, 철의 원료가 되었던 철광석(鐵鑛石)과 사철 등이 채취됩니다.

대가야의 고분에서는 고리칼, 쇠창, 쇠도끼, 화살촉 등 많은 무기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전투에서 직접 사용되기도 했지만 묻힌 사람이 살았을 때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고리칼의 손잡이에는 금이나 은으로 용과 봉황, 넝쿨무늬(唐草文) 거북등무늬 등을 화려하게 새겨 놓았습니다. 쇠창 중에도 나무 자루를 꽂는 쪽에 은판으로 둘러 장식한 것도 있습니다.

  1. 01대가야인의 옷
    대가야 사람들의 무덤에서는 실을 만드는 도구인 가락바퀴가 흔히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베틀을 이용하여 옷감을 만들었다는 증거입니다. 뿐만 아니라 갑옷이나 금동관, 말방울 등 금속유물의 표면에는 가죽이나 직물의 흔적이 엉겨 붙은 채로 남아있기도 한데, 비단처럼 올이고운 직물이 붙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왕족을 비롯한 지배층에서는 비단옷도 입었다고 생각됩니다. 옷차림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일본서기≫에는 대가야 사람들은 신라 사람들과는 다른 옷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 02대가야인의 음식
    대가야 사람들은 대가천과 안림천 유역의 넓은 들판을 이용하여 주로 농사를 지으며 오곡을 주식으로 삼았고 산나물과 과일을 먹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가축을 기르며 물고기도 잡고 산짐승을 사냥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대가야 무덤에서 낫ㆍ괭이ㆍ쇠스랑 등의 농기구와 함께 기장ㆍ복숭아 등의 씨앗이 나오고, 말ㆍ닭ㆍ꿩ㆍ민물고기 등의 뼈가 출토되는데서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토기 속에서 대구ㆍ청어ㆍ고둥ㆍ소라ㆍ굴ㆍ게 등 바다생선과 조개류가 출토되어 멀리 바다에서 잡은 먹거리도 들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03대가아인의 집